지난 일요일, 필요한 책을 구매하기 위해 종로의 대형 서점인 교보문고에 갔을 때였다. 주말이라는것을 실감이라도 하듯, 수많은 인파 속에 묻혀 내가 찾는 책을 찾던 도중, 고전소설 서가에서 문득 눈에 띄는 책 한권이 있었다. 그것이 프랑켄슈타인이다. 부끄럽게도 난, 입시시절 이후로 제대로 된 장편 소설 하나 읽어본 적이 없었다. 결국 그것이 내 마음의 양식의 고갈이 되어 심성에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르겠다. 분명한것은, 내 문학적 상식과 작문실력에 엄청난 하향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프랑켄슈타인, 워낙 유명하다보니 대강의 전개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내가 아는것이라고는 괴물의 이름이 프랑켄슈타인이라는 것, 그리고 흥미 위주의 공포소설이라고 생각했던 잘못된 지식뿐이었다. 지하철에서, 또 시간이 날때마다 책장을 넘겨갈수록 빠져들며, 내가 이 고전에 대해, 또 다른 명작 소설들에 대해서 얼마나 평가절하한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작품의 중반부터, 작가는 인간에 대한 가장 추악한 면모인 양면성을 맹렬하게 비판한다. 이성을 지닌 존재가 처절하게 고독해질때의 고통과, 온정에 대한 끝없는 목마름에서 비롯된 그릇된 복수심은, 결국은 모두를 파멸로 이끌게 된다. 의외였던 것은 괴물에 대한 자세한 모습이나, 과학적인 실험장면에 대해서는 거의 공백에 가까울 정도로 짤막하게 씌여 있다는 것이다. '괴물' 의 외모 묘사로 독자에게 저급한 공포를 심어주는것이 아니라, 인간 본성에 대해 다루고 있다. 고결하고 순수한 사람이었지만, 자신이 소중한것을 지키기 위해서 기꺼이 아집의 노예가 되고 마는 주인공을 보며, 나는 내 모습과 비교하기도, 내가 그의 입장이 되어보기도 하며 생각에 잠길 수 있었다.
작품 중간에, 밀턴의 '실락원' 인용문이 나온다.
"창조주여, 제가 부탁했습니까, 진흙에서 저를 빚어 사람으로 만들어 달라고? 제가 애원했습니까, 어둠에서 절 끌어내 달라고?"
이 글귀를 보고, 난 머리를 한대 맞은 기분이었다. 자신의 어리석은 호의가, 남에게 얼마나 고통이 될 수 있는지, 미처 와닿지 않았었던 것이다. 이것이 내 최근의 문제에 대한, 불완전하지만 답이 되어주었다. 겨우 납득은 할 수 있게 될 정도의 답, 부족한것이 무엇인지는 더 생각해볼 문제이다.
프랑켄슈타인, 워낙 유명하다보니 대강의 전개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내가 아는것이라고는 괴물의 이름이 프랑켄슈타인이라는 것, 그리고 흥미 위주의 공포소설이라고 생각했던 잘못된 지식뿐이었다. 지하철에서, 또 시간이 날때마다 책장을 넘겨갈수록 빠져들며, 내가 이 고전에 대해, 또 다른 명작 소설들에 대해서 얼마나 평가절하한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작품의 중반부터, 작가는 인간에 대한 가장 추악한 면모인 양면성을 맹렬하게 비판한다. 이성을 지닌 존재가 처절하게 고독해질때의 고통과, 온정에 대한 끝없는 목마름에서 비롯된 그릇된 복수심은, 결국은 모두를 파멸로 이끌게 된다. 의외였던 것은 괴물에 대한 자세한 모습이나, 과학적인 실험장면에 대해서는 거의 공백에 가까울 정도로 짤막하게 씌여 있다는 것이다. '괴물' 의 외모 묘사로 독자에게 저급한 공포를 심어주는것이 아니라, 인간 본성에 대해 다루고 있다. 고결하고 순수한 사람이었지만, 자신이 소중한것을 지키기 위해서 기꺼이 아집의 노예가 되고 마는 주인공을 보며, 나는 내 모습과 비교하기도, 내가 그의 입장이 되어보기도 하며 생각에 잠길 수 있었다.
작품 중간에, 밀턴의 '실락원' 인용문이 나온다.
"창조주여, 제가 부탁했습니까, 진흙에서 저를 빚어 사람으로 만들어 달라고? 제가 애원했습니까, 어둠에서 절 끌어내 달라고?"
이 글귀를 보고, 난 머리를 한대 맞은 기분이었다. 자신의 어리석은 호의가, 남에게 얼마나 고통이 될 수 있는지, 미처 와닿지 않았었던 것이다. 이것이 내 최근의 문제에 대한, 불완전하지만 답이 되어주었다. 겨우 납득은 할 수 있게 될 정도의 답, 부족한것이 무엇인지는 더 생각해볼 문제이다.